“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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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태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02.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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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육대 부지소송 사건’ 주인공 박귀섭 장로
1948년 이왕직(문화재 관리국)으로부터 20여만 평의 땅을 구입했는데, 1961년 구황실 땅 관리부서인 이왕직 사무소 직원이 경질되면서 “왕릉을 개인에게 매매한 것은 잘못”이라며 국가가 원인무효 등기말소 소송을 제기, 근 8년간 재판이 계속되었던 사건이다.
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학의 명운을 책임지고, 온갖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국가와 상대하여 삼육동 부지를 지켜내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우리 시대 역사의 산증인이 있다. 바로 박귀섭(79, LA 올림픽교회) 장로가 그 주인공이다.
8년간 다섯 번이나 승소와 항소를 거듭하는 피 말리는 혼전 속에서도 하나님의 귀한 재정과 교육의 전당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하고 헌신했던 박귀섭 장로를 만나 보았다.
팔순의 나이를 눈앞에 둔 고령에도 노신사는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당시의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삼육대학은 1948년 당시 꽤 많은 돈이 필요하던 구황실로부터 학교 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강릉 뒤편 20여만 평의 땅을 구입하였으나 곧 6.25 동란이 발발, 많은 혼란의 와중에 상당량의 증빙자료와 서류들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던 중 1961년 이왕직(문화재 관리청) 관리국의 직원이 경질되면서 “왕의 능지를 개인에게 매매할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원인무효 등기말소 소송’이 국가로부터 제기되었다. 근 8년간 국가와 한 교육기관과의 피 말리는 법정 소송이 빚어진 ‘삼육대 부지 소송사건’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동란 이후 아무런 법적 증빙자료가 없었던 대학측은 서울지방법원에서의 1심에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패소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인민군들에 의해 휴지통에 버려졌던 매매 계약서가 부동산 관계서류의 등기회복을 위해 수고하던 당시 재단 사무책임자 오석영 목사에 의해 발견되어 고등법원에 상고, 승소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안도와 기쁨도 잠시,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삼육동을 마음에 품은 정부측이 쉽사리 이 땅을 포기할리 만무했다. 이왕직측은 곧 대법원에 항소하여 고등법원의 판결은 파기되었고, 또다시 대법원과 고등법원을 오가는 법정 투쟁은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었다.
당시 대학 총무과 직원이었던 박귀섭 장로는 본 재판의 삼육대학측 책임자가 되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학교의 부지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삼육대에 부지를 팔았거나 측량을 맡았던 증인들을 수소문해 찾아내고, 법정에 이들의 증언을 이끌어 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쉽사리 법정에 서지 않으려는 이들을 증인으로 세우기까지에는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이 뒤따랐다. 때론 눈물어린 호소로, 때론 동정심에, 때론 공갈에 가까울 정도의 회유로, 이들의 증언을 받기 위해 헌신을 다했다. 박 장로의 이러한 정성에 감복한 이들은 후에 증언대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중 한 명이 국문과 영문으로 작성했던 당시 매매계약서의 증인으로 서명했던 필리핀 대사 이 모씨의 아버지인 이영훈(문화재 관리국 회계과장 역임) 씨다.
그러던 중 1969년, 이 재판을 마무리 짓는 중요한 사건이 박 장로의 손끝에서 이루어진다.
그가 문화재 관리청 서고에 있던 관리국 재산관리 대장에서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 223-1번지(당시 삼육대의 행정주소)’ 일대 21만3천 평의 임야 및 대지의 소유주가 ‘삼육신학원’ 이라는 문서를 찾아낸 것이다.
1주일간 각고의 노력 끝에 문화재 관리국 서재를 이 잡듯 뒤져낸 결과였다. 이것이 재판을 승소로 이끌어 내는 결정적 증빙자료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최종 판결일, 이 자료를 요구하는 판사에게 문화재 관리국 직원들은 선뜻 자료를 제출하지 못하고 재판정을 회피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몇몇 교회원로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기도 하다.
4심까지 가는 법정투쟁은 이것으로 종결되었고, 법정은 대법원에 재상고하여 확정 판결을 받아 등기 소유권을 찾아가라는 판결을 내리며 8년간의 지리한 공방을 마무리 지었다.
이후에도 박 장로는 6.25 동란으로 인해 소실된 삼육대의 재산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제24회 한국연합회 총회는 이러한 박 장로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공로표창장을 수여했다.
약 여섯 시간 동안의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만약 당시 그의 그같은 헌신이 없었더라면 과연 지금의 삼육동이 이처럼 평화롭고 온전하게 현존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니 삼육동의 나무 한그루, 모래 한 톨까지 더욱 소중하게 다가왔다. 따스한 봄 햇살은 더욱 청명하고 눈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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